여러분에게 친숙한 러시아 작가는 누구인가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여러 차례 영화화된 작품을 쓴 톨스토이? 이름만큼 긴 작품을 쓰기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두 작가 모두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대문호들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작가는 따로 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지금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러시아가 사랑하는 그 남자, 푸쉬킨!
푸쉬킨은 1799년 6월 6일 모스크바의 명문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의 생김새를 보면 그가 일반적인 옛 러시아 귀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그의 외가인 간니발 가문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표트르 대제 동상Медный Всадник,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간니발 가문을 만든 푸쉬킨의 외할아버지는 명석한 두뇌로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아 귀족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흑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흑인 핏줄을 가진 간니발 가문과 푸쉬킨 가문이 만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이라는 러시아 최고의 시인이자 소설가가 탄생했지요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 가문이 그러하듯이 푸쉬킨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 귀족들이 드나들던 화려한 무도회장의 내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러시아어를 농민들이나 사용하는 하찮은 언어로 취급하고 프랑스어를 귀족들만의 언어로 정착시켰지요. 다행히도 푸쉬킨의 경우에는 그의 할머니와 러시아인 유모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이나마 러시아어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작가로서의 명성은 존재할 수 없을 뻔했지요.
1811년부터 푸쉬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차르스코예셀로(황제의 마을)의 왕립기숙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왕립기숙학교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그곳은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만 다닐 수 있는 상위 계층의 학교였습니다.
(차르스코예셀로Царское Село,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그곳에서의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라도 잘하지 못하는 과목은 있었나봐요~ 하지만 그가 발표한 시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 극찬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립기숙학교에서의 학생시절은 그가 시적 재능을 발견한 계기가 되기도 했고, 또한 친구들을 통해 진보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디딤돌이 되어주었습니다.
왕립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1817년 푸쉬킨은 외무성에 취직하여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무성의 일보다는 차츰 진보적인 시를 발표하는 데에 더 몰두하게 되지요. 그는 작품들을 통해 농노제를 타도하는 등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는 성향을 띠게 됩니다. 결국 황제는 푸쉬킨은 1820년 오데사라는 도시로 유배를 보냅니다. 당시 러시아 귀족에게 내려진 유배는 수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을 뿐 가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푸쉬킨은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국외망명 실패 후 푸쉬킨은 미하일롭스코예라는 도시에 다시 한 번 유배되는데요, 바로 이 시절에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최고의 걸작을 거의 마무리하게 됩니다.
(마린스키 극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브게니 오네긴>은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러시아 오페라와 연극의 소재가 되고 있을 정도로 러시아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푸쉬킨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1826년 수도로 돌아온 푸쉬킨은 5년 뒤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아내로 맞이한 나탈리야 콘찰로바가 푸쉬킨의 삶에 극적인 종지부를 찍게 만듭니다. 나탈리야 콘찰로바는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미모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여러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지요. 특히 프랑스 망명귀족인 단테스는 대놓고 나탈리야 콘찰로바에게 청혼을 하는 등 푸쉬킨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총으로 서로를 쏘아 승부를 결정하는 결투도 흔했습니다. 푸쉬킨과 단테스는 결투를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1837년 2월 8일. 이 두 남자는 러시아 근교의 공터에서 만납니다. 전형적인 결투 방식대로 서로 가운데 지점에서 열 발자국을 걸어간 후 권총을 겨눕니다. 쓰러진 것은 푸쉬킨이었습니다. 이렇게 결투에서 얻은 총상 때문에 심하게 앓게 된 푸쉬킨은 이틀 후인1837년 2월 10일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지요. 이미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인기를 얻고 있던 푸쉬킨은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그의 인생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푸쉬킨 동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렇게 전 생애에 걸쳐 많은 일들이 그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던 것 마냥 푸쉬킨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시를 남겼습니다. 1970년대 이발소 마다 하나쯤은 걸려있었다고 하는 시라고들 하죠? 곧 2014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시를 읽으며 이번 기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영 글로비스 리포터 1기 권보희였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사진 출처 : 본인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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