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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정보통

윤봉길의사의 삶




 







안녕하세요 영글로비스 독자 여러분!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이번학기 한국사 수업을 감명 깊게 듣고 애국심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신 위인들의 업적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신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오늘은 그러한 분들 중 ‘윤봉길의사’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윤봉길의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윤봉길의사’의 ‘봉길’이 그의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 라는 걸 알고계신가요? 잘 모르셔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영글로비스와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되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윤봉길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요?

 

 

 

 

1908년 6월21일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윤봉길의사는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글을 익혔으며 어머니의 도움으로 말 더듬는 버릇도 고쳤습니다. 또한 동네아이들과 다툼에서 단 한 번도 진적이 없을 정도로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윤봉길 의사는 덕산장터에서 일어난 3.1 독립운동을 보고 겪으면서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이후 ‘성주록’ 선생님에게 사서삼경 등 한학을 배우고 동학사상화 각종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민족 문제와 농촌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윤봉길의사는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각종 서적 등을 통해 국내외 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한 청년이 마을 인근의 덕숭산 공동묘지 팻말을 한아름 뽑아들고 와서 윤봉길의사에게 자기 아버지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묘지 묘표사건’인데 이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묘표는 물론 다른 모든 묘표까지 표시를 남기지 않고 들고 찾아와 아버지의 묘비는 물론, 다른 묘비조차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사건입니다. 이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경험하고 윤봉길의사는 적극적으로 문맹퇴치를 위한 농민운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특히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농민독본> 3권을 편저하였으며, 192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기사년일기> 에는 일제 식민지하 조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울분을 표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추구한 농민운동은 단순히 농민들의 문맹퇴치 운동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의 정체성, 독립사상에 대한 교육까지 포함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윤봉길의사는 ‘공동묘지 묘표사건’이후 문맹퇴치를 위해 자신의 서당에서 야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학부형과 동네 청년들에게 우리글과 역사, 영농방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윤봉길 의사는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위해 1928년 부흥원을 설립하였는데요. 부흥원의 설립 목적은 일제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로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공동재산의 증가를 목적으로 ‘위친계’를 설립하였으며 농민들의 상부상조와 자급자족을 위한 농촌의 부흥과 더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월진회’를 설립해 운영하였습니다. 이러한 윤봉길의사의 노력은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문맹퇴치운동 및 농민운동을 하던 윤봉길의사는 1929년 봄에 학예회를 열어 이솝우화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일제 감정기의 농촌 실태와 무자비한 일제의 통치를 풍자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연극이후 윤봉길의사는 일제에게 곤욕을 치루고 계속하여 감시와 조사를 받게 됩니다. 조국의 현실과 농촌운동의 한계를 느낀 윤봉길의사는 오랜 고민 끝에 목숨을 걸고 일제를 타파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윤봉길 의사는 1930년 3월 ‘장부출가생불환’ 이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 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윤봉길의사는 여러 잡일들을 하며 김구를 기다리다 마침내 김구를 만나 상하이에 온 목적을 말하고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윤봉길의사의 진심을 확인한 김구는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할 ‘홍커우공원 의거’ 계획에 대해 언급하였고 김구와 함께 비밀리에 ‘홍커우공원 의거’를 준비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김구와 1932년 4월 29일에 거행할 ‘홍커우공원 의거’에 대해 논의하고 폭탄사용 방법 등을 배우게 됩니다. 일제는 상하이사변 승전 축하 기념식과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기념식인 ‘천장절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다고 보도했고, 이른 아침 일찍 도착한 윤봉길의사는 기념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깨에 메었던 수통형 폭탄을 기념식 단상으로 던졌습니다. 단상에 서 있던 파견 일본군사령관 사라카와 요시노리등 일제의 군부와 정계 주요인사 7명이 모두 쓰러졌으며 홍커우공원의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결행한 ‘홍커우공원 의거’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여러 나라에 보도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고 중국인들의 항일투지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김구와의 협의를 거쳐 뤼양의 중국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운영하는 등 중국정부의 태도 변화로 한중연합전선 결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중국 내에서의 새로운 독립운동 여건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하와이 등 미주지역 한인교포들의 재정지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파견 일본헌병대사령부에 감금된 채 두 차례의 신문을 받고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시 교외에 위치한 일본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한글, 밤에도 자유롭게 한글 책을 볼 수 있는 자유. 이러한 모든 평범한, 다양한 자유를 억압받는다면 어떨 것 같나요? 이러한 자유를 억압받던 시대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윤봉길의사에게 다시한번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다음번에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